성경에 “그는(예수님은) 몸인 교회의 머리라”(골 1:18) 했고,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 하나님도 하나이시니”(엡 4:4-6) 라는 말씀이 있다. 하나의 교회라는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하여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루어지는 ‘거듭난’ (요 3:3) 성도의 교제를 말하는 것이지, 이단감별사들이 강조하는 ‘정통교회’도 아니고 어떤 특정 교단이나 교파 교회도 아니며 분명히 ‘구원파 교회’도 아니다. 그러한 교회들 속에 확실히 거듭난 성도들이 있다면 그 개개인들이 연결되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유병언씨의 저서 <알파에서 오메가까지>에서 “ ‘내가’는 이루어집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요 15:1)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요 15:5) 라고 한 그 포도나무 둥치가 바로 이 땅 위에 성령으로 와 계십니다. 거기에 우리가 교제가 형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성도의 몸이 형성되지 않고는 주님의 원(소원)은 이 땅 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라고 분명히 말함으로써 주님의 소원은 이 땅 위에 주님의 몸인 교회가 형성되는 것임을 밝히 지적하고 있다.

특히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교제’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적인 생활을 통칭하는 것이지 ‘구원파 교인들끼리 만의 사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우리가 교제를 형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라는 문장 앞에는 “그 포도나무 둥치가 바로 이 땅 위에 성령으로 와 계십니다.” 라는 말이 있으니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이 땅에 오시고 교회가 형성된 지 2천 년이 지났고 소위 ‘구원파’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그런데 비방을 업으로 하는 정동섭 소장은 “우리가 교제를” 이라는 말에서 ‘우리가’를 지난 2천 년간 이어온 ‘교회’로 생각지 못하고 ‘구원파 교회’로 왜곡하는 오류를 범했다. 또 “구원파에서는 예수님이 포도나무가 아니라 구원파 교회가 참 포도나무라고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까지의 모든 교회들은 “너희는 가지니” 하신 말씀대로 가지들일 뿐이다.

<알파와 오메가까지>의 원문에는 이 내용 뒤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는 예수님의 말씀이 인용되어, 참 포도나무에 대해 확실히 하고 있는데, 정 씨는 자신의 책에서 그런 내용은 제외한 채 구원파 교회가 ‘참 포도나무’라고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정동섭 소장의 책을 읽는 사람들은 <알파와 오메가까지>의 원문을 읽지 못했으니 속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알파에서 오메가까지>는 1978년에 제1권이 발행되어 1980년 7월, 제6권이 발행된 후 절판되었으며, 1980년대에 <영혼의 목자>라는 제목으로 3권으로 압축되어 재판되었으나 지금은 구입하기 어렵다. 그러니 정동섭 소장 같은 사람이 마음대로 인용하여 거짓말을 해도 독자들은 분별치 못하는 것이다.

로마서 12장 1절의 ‘너희 몸’(your bodies)은 우리말 성경의 어느 번역본에도 ‘너희’라는 복수로 되어 있다. 우리말의 단수와 복수를 구별할 줄 안다면 ‘너희 몸’을 ‘너의 몸’으로 바꾸어 말할 수 없다. 이 경우 역시 의도적인 중상모략이 아니라면 정 씨 자신의 개인적인 착각일 것이며, 정 씨는 구원파의 이단성이 아니라 스스로의 믿음을 점검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1999년 8월 7일, 사도행전 강연(31회)
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교회’ 라는 말이 몇 번씩 나옵니다. (중략) 율법과 은혜를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교회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그 교회는 어느 지방에 있는 교회나 어느 집에, 어떤 지방에 몇 군데 있는 교회나 이런 것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든 성도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이 아주 뚜렷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역사 2천년 세월을 살펴보면 교회라는 주장을 할 때마다 사람들은 어떤 이런 큰 건물, 예배당 이런 식으로 자꾸만 생각이 빼앗겼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이 있었고 그 성전을 상당히 중시했는데도 예수께서 오셔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하는 말씀을 유대인들은 알지 못하고 예수를 죽였습니다. 또 예수께서 죽으실 때 성전 안에 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복판이 갈라졌는데 그러면 그 구시대 것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히브리서의 경고의 말씀처럼(히 10:38-39 참조) 옛것이 좋다고 또 뒷걸음쳐서 물러갔습니다. 그렇듯이 오늘날에도 교회라는 주장이 나올 때 거기에 은연중에 성전 개념이 들어 있어서 ‘유대인들이 섬기는 성전’, ‘전’, ‘거룩한 전’ 이런 식으로 자꾸만 내용을 연결 짓는, 성경과는 조금 차이가 있는 그러한 주장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4장 23절에 보면,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하는 이 말씀을 읽었을 때 서울 동쪽에 교회가 있고, 서쪽에도 교회가 있고, 남쪽에도 교회가 있고, 북쪽에도 교회가 있는데, 그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차출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27절에는 전혀 다른 내용이 나옵니다.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실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무엇을 모았다고요? 그러면 동쪽에 있는 서쪽에, 동쪽, 서쪽, 북쪽, 남쪽에 있는 교회 전부 두드려 부수어 한데 모았다 그 말입니까? 우리 관념대로 생각해 봅시다. 예배당을 다 부수어서 긁어모아서 거기서 하나님이 함께하신 일을,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했다” 그렇게 말했습니까? 그것과는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여기 ‘이르러 교회를 모았다’는 것은 믿는 성도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는 것입니다. 인격체들을 모았다. 말하자면 믿는 성도들을 모았다,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이 세상에서 분리된 사람들을 모았다, 그리스도 안으로 분리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옛적 이집트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사람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불러내서 광야에서 사십 년간 활동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일을 일컬어 스데반은 순교 직전에 “광야 교회”(행 7:38)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뽑아낸 무리, 분리된 무리, 광야에서 활동하던 그 회중,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인도하던 그 회중,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던 그 회중을 말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에클레시아라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27절에 있는 “교회를 모아” 하신 말씀은 광야 같은 세상에서 죄스러운 삶을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영혼이 건짐을 받은 사람들, 구원받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 영혼들을 모은 것입니다. 세상과 싸울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일컬어 교회라고 합니다.

1998년 8월 15일, 요한복음 강연(43회)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요 15:1) 우리는 누차 요한복음을 공부하면서 구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포도원을 만드셨다는 내용도 읽어 보았습니다. 또 산울로 두르고 또 망대를 짓고 그런, 포도즙 틀도 만들고 그런 이야기도 많이 읽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포도원이라든가 어떤 포도밭이라든가 포도 즙 짜는 틀이라든가 하는 것은 전혀 상관없이, 어떤 나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 어떤 성경을 읽어 보면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포도가지만큼 가치 없는 가지도 없다는 것입니다. 포도 가지는 열매만 맺는 것이지 꾸불텅꾸불텅하기 때문에 불 때는데 밖에는 어디 쓸 데가 없대요.(겔 15:2-5 참조) 옛날 어릴 때 저가 포도농원 하는 집에 산 적 있었기 때문에 잘 압니다. 포도나무가 얼마나 삐뚤삐뚤한지.

그런데 포도나무 열매를 원하는 주인의 원이 있는데 주인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포도나무는 누구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아들 예수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포도나무의 가지는 누구냐 하면 믿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