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라는 것은 교회의 역사가 흐르면서 계속 바뀌어 왔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제도가 다르고, 프로테스탄트의 제도도 교파마다 각각 다르다. 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교파 간 신학의 다름을 인정한다.

그런데 몇 가지 구원파가 기성교단과 다른 제도의 특이성을 이유로 해서 구원파에서 그 모든 것을 다 무시하는 이단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구원파가 여타 다른 교단과 다른 것은 목사 제도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파의 정관 제12장 <교역자> 항목 제33-42조에는 교역자의 직능, 자격, 양성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는 여타의 교회와 다름이 없는 엄격한 내용이다.

또 새벽기도는 개인의 자유로 하고 전도인이 기도회를 인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새벽기도는 우리나라 기독교의 독특한 습관이지 교리는 아니다. “구원파는 개인 및 공중 기도와 경배와 찬양을 부정한다”며 이단이라고 하는 말은 ‘구원파’가 기독교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처럼 들릴 수 있으며, 이는 ‘정통교회’와 ‘구원파’를 이간하는 말이다. 현재 기성교회의 예배 모습도 ‘감정의 배설’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음을 볼 때, 교회에서는 스스로 예배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누가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우선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난(다시 태어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고, 진리, 즉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라고 했으니 예수 안에 있는 자만이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 그리고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는 말씀을 볼 때 ‘예배’라는 말을 함부로 쓸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예배의 분위기가 다르다고 해서 구원파가 예배를 부정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구원파 각 교회의 주일 예배와 특히 한국에서 일 년에 한 번 크게 열리는 국내외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해 보면 ‘구원파’가 예배를 부정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형태는 조금씩 다를 수 있겠으나 개인 및 공중 기도와 경배, 찬양하는 모습을 이러한 집회를 통해 만날 수 있다. 유아세례의 경우도 가톨릭에서 유래된 것이니만큼 성경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침례교, 그리스도의 교회, 하나님의 성회 등이 반대하고 있으나, 유아세례를 행하고 있는 장로교나 감리교, 성결교 등에서 이를 행하지 않고 있는 타 교파를 이단시하지 않고 있다. 구세군이 그들의 독특한 군대식 조직으로 계급을 정하고 떠들썩하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을 당시에도 비난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제도가 교리는 아니며 사도신경을 벗어나지 않는 한 이단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기독교의 공통된 교리는 ‘사도신경’에 요약되어 있다. 그리고 각 교단 교파마다 제도와 예배의 형식은 조금씩 다를 수 있다. 그것이 교리는 아니기 때문에 형식이 다르다고 해서 이단이라 할 수는 없다.

예배와 찬송, 십일조와 기도에 대한 설교 내용은 아래와 같다.

1998년 11월 28일, 요한복음 강연(52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네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아버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요 20:17)
그 후, 이렇게 말씀하신 사십일 후에 주님이 승천하셨지만, 그 전에 살아나신 부활의 영혼, 바로 우리 영혼이 하나님 앞에 간직될 것까지도 약속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40일 후에 승천하실 때에 우리가 하늘에 앉힌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때 흔들릴 때, 예수님의 부활 때, 살아나셨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책에 같이 얹히게 된 겁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그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가, 또 예수께서 살아나신 이 부활의 아침, 이 날은 이 지구에 인간이 태어났던 모든 날 중에, 태어나서 살고 죽는 가장 중요한 이 모든 날 중에 가장 귀한 날이기에 우리는 주일날에, 안식 후 첫날, 주 중 첫 날에 모여서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합니다.

2000년 10월 7일, 로마서 강연(34회)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날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날이 되어야 된다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 강해서 우리는 주일을 지킨다, 안식일을 지킨다 할 때 그것가지고 논쟁은 벌이지 말라는 부탁입니다. (중략) 하나님 앞에서 어느 날이 가장 중요한 날인가. 저에게 묻는다면 어릴 때는 크리스마스 날이 제일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선물을 넣었거든.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날이나 주일날이나 이러한 날들이 상당히 비중을 많이 차지했었는데, 이제 복음을 안 이후에는 물론 주중 한 날이 중요하기도 합니다만, 모든 날 주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한번 씩 더 느낍니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을 마치는 날이 꼭 남이 말하는 안식일이나 주일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월요일이든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어느 날에 이 세상을 마칠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일을 대단히 중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만이 최고인 줄 압니다. 그 사람들은 보통 날보다 안식일 날이라고 해가지고 주일을 혼동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 우리가 먼저 알아야 될 것은 어느 날에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될지 모릅니다. 일주일 중에. 언제 주님을 만날지 모르는 그러한 삶에서 우리가 찬송 “날마다 주와 버성겨 그 크신 사랑 버리고 방탕한 길로 가다가”(찬송가 333장) 그런 찬송 부르듯이 옛날 우리는 날마다 주님을 버리고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날마다 다른, “날마다 입으로 간증해”(찬송가 215장) 하는, 늘 주님과 함께 살아간다 하는.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찬송가 427장) 하는 그 찬송대로. 어느 한 날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2003년 1월 5일 LA 강연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말 3:8)
도적질 안 했다는 거예요, 절대. 그렇지만,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8-10)
이 복과 관계됩니다. 아무리 아끼고 아무리 자기가 준비하고 저축해도 벌레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요나서 읽어보면 정확히 되어 있습니다. 박 넝쿨 아래 있을 때 벌레는 박 넝쿨 씹고 있었습니다. 그 그늘이 자기(벌레)에게 필요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일으킨 산업, 우리가 일으킨 어떤 직업, 우리가 애써 모은 돈 전부 다 아무리 내게 육신적인 축복을 가져다 준 것 같아도 벌레는 씹고 있습니다. 병들고 있어요. (중략) 구원받는 조건에는 아무리 십일조 많이 드렸다고 해서 구원은 안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축복과 직접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말은 안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했습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된다. (중략)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누구를 위해서 사는 것인지, 복음을 깨달은 후에 자기가 누구 것인지 확실히 안다면, 정확하게 ‘하나님 것은 하나님께,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마 22:21 참조) 정확하게, 결정이 나 있습니다.

2002년 2월 19일, 로마서 강연(2회)
이방인들이 예수 믿고 하나님의 교회의 일원이 되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이 사람들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기 힘에 지나도록 바친 많은 헌금들이 예루살렘으로 옮겨지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옮기는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15:27)

이 일을 가지고 성경은 “성도를 섬기는 일”(롬 15:25)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은사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중략) 바울 사도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롬 1:11) 할 때, 예를 들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고 괴로움을 겪고 있는데 우리도 그들을 위해 부조하자. 한번 모아 가지고 전해 주자.’ 하는데 거기 거듭난 것이 무언지, 구원받은 것이 무언지, 죄 사함 받은 것이 무언지 모르는 종교인들이 교회에 꽉 들어앉아 있다가, 같이 섞여 있다가 ‘나도, 나도.’ 하고 낸다면 그 돈이 하나님 앞에 가겠어요, 못 가겠어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 먼저 바쳐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죽 읽어보면 자기를 먼저 드리고 헌금이 따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사람의 활동 자격증이 주어진 것입니다.

1998년 6월 14일, 요한복음 강연(38회)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8)
무섭지요? 이 말이 마지막 날에 우리를 심판합니다. 그것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나는 교회 다니면서 열심히 기도도 하고. 뭐 어떻게 다 하고 다 했다.”고 하지만, 예수께서는 네가 “내가 산상설교를 할 때 잘 들어 보았느냐?” 그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예수님 설교를 쭉 들으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잘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6:5 참조)

1998년 7월 11일, 요한복음 강연(42회)
우리는 성경을 읽다가 보면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7-8)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고 이어집니다.(마 6장 참조) 말 많이 하고 문장력 좋으면 되는 줄 아는데, 그것 다 폐일언하고 예수님께서 간단한 기도 문구를 전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신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이 없고, 그 구절을 바꿔가지고 ‘너희는 이렇게 외우라’ 하는 줄 알고 착각을 하고 있다 그 말입니다. 주기도문 앞에 너희는 이렇게 외우란 말이 어디 있느냐 이겁니다. 외우는 거야 다른 성경과 같이 외울 수 있지만, 그 내용을 먼저 음미해야 되지 않느냐 그 말입니다. 그 내용을 먼저 살펴야 되지 않느냐 그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