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파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구원파에 대해서 ‘깨달음파’, ‘중생파’라고 하면서 피동적인 깨달음 자체가 구원을 얻게 하는 것처럼 주장한다고 말하고 있다.

‘거듭 난다’, ‘죄 사함을 받는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깨달음이 중요한 것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죄(원죄와 자범죄)를 깨닫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은혜도 깨달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기계적이거나 피동적인 것이 아니다. 죄와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해 지식을 얻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성경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시인하고 그 죄를 중심에 통회하는 마음으로 뉘우칠(회개할) 때 비로소 그 모든 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단번에 영원히 대속되었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수 있는 것이다. 회개와 믿음이 수반되는 이러한 깨달음은 의지와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도우심과 조명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구원파에 몸담았다가 기성교회로 옮겨간 정동섭 소장은 말씀을 깨닫게 되면서 회개와 믿음이 수반되는 구원의 역사를 강조하는 구원관을 왜곡해서 구원파는 깨달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며 회개와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으로 여긴다고 주장했다. 한국 교회에서는 이러한 왜곡된 주장을 여과 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구원파는 깨달음을 강조하는 차원을 넘어 깨달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중생파가 되어 버린 것이다.

권신찬 목사는 자신이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게 되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자신에게 덧입혀 진 사실을 알기 전까지 자신 속의 죄와 위선을 괴로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날들을 고백하였다.[권신찬, <양심의 평화> , 1984, 기독교복음침례회출판부, p. 43~51]

물론 권신찬 목사는 지적으로만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는 지적 신앙은 배격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의지의 힘으로 믿기를 결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해 가려고 합니다. 곧 의지의 결단력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지적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영이신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권신찬 목사의 이런 신앙 고백만을 따로 떼어 내어 기독교복음침례회는 ‘의지적으로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가 없다고 주장하는 정동섭 소장은 권신찬 목사가 하나님의 의로 옷을 입은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겪어 온 암흑의 여정에 대한 기록을 꼼꼼히 살핀 후 권신찬 목사가 어떤 취지로 지적 신앙을 배격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굴절된 시선으로 구원관을 왜곡하는 기성교단은 다음 성경들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다.

-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 1:6).

-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골 2:2).

-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약 2:1)

-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 1:3)

-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후 1:1)

이 성경 구절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는 깨닫는 것이며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한편으로는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돌이키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는 성경은 궁극적으로 믿음은 받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는 깨닫는 것이라 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며,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느냐 마느냐의 선택은 사람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때 자유의지로 먹느냐 마느냐를 선택했듯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것이냐 마느냐를 선택하는 것도 사람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과정이 사람에게 필요하며 그것이 곧 회개라고 강조한 설교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1997년 11월 15일, 요한복음 강연(8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이 내용을 가지고 물은 무엇이고 성령은 무엇이고 많이들 따집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물로 침례 받는 것이 그 물이라는 말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말씀의 흐름을 볼 때 말씀으로 거듭난다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강력한 설교를 듣던 사람들이 마음에 뉘우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회개의 세례입니다. 이러한 회개 과정을 통해서 성령이 그 사람의 영혼에 임재한다는 내용을 여기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될 것입니다.

2000년 1월 20일, 복음서 강연(5회)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1:9) 라는 말씀을 봅시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었지만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너희 가운데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소리를 듣고,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를 듣고, 마음이 낮아지고, 마음의 평탄 작업이 되었을 때, 회개하고 뉘우쳤을 때, 죄를 자백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을 때 비로소 예수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작업을 세례요한은 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고 있었는가? 그것은 참빛이 왔는데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고 사람들에게 왔을 때 각 사람에게 그 빛이 비취려고 하는데 그들이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에 세례요한은 그 사람들에게 준비를 시켰던 것입니다.

2000년 7월 24일, 하기수양회 강연(저녁)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눅15:17) 하는 이 사람의 심정은 오늘날 정신 차리는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이여 당신의 종 선지자들이 기록한 성경은 내 영혼의 갈증을 메꾸고도 남습니다. 내 영혼의 굶주림을 채우고도 남습니다. 그 주님의 일꾼들이 만들어 놓은 이 거룩한 말씀을 먹고 살아도 내 영혼은 그 나라 가기까지 평안히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략) 이 사람이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돌이킨 일 하나입니다. “내가 일어나”(눅 15:18) 박차고. 헌 누더기 같은 것 벗어 던져 버리고. 아예 내 현실을 외면해 버리고. 나를 괴롭혔던 모든 문명의 이기, 나를 죄악으로 몰아가는 것이 있었다면 ‘하나님 이것 말고 당신 품에 안기겠습니다.’ 하는 자세입니다. 마음의 회개라 하니 그냥 수동적으로만 마음으로, 십자가에 달린 강도처럼 ‘마음으로 믿었습니다.’ 하고 주저앉을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처럼 능동적으로, 이왕 회개했을 바에야 ‘주님, 그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이제 나 떠납니다.’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지난 날 나를 즐겁게 했던 것들, 내 육체를 만족케 해 주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하나님에게 위배되는 것을 알았을 때 과감히 불태워 버릴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느냐.

2001년 6월 30일, 복음서 강연(24회)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약 2:1) 믿음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믿음이 잠깐 필요할 때는 있습니다. 복음을 한참 듣다 보면, ‘아, 이제 믿습니다.’ 하는 생각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내가 믿습니다. 주여, 내가 믿습니다.’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내가 먼저인지 주님이 먼저인지 모르지만 순간 믿어져 있는 사실을 압니다. ‘믿어야지’ 하는 각오도 필요했지만 어느 순간 ‘아, 되었구나.’ 무엇인가 끈이 탁 풀린 것같이 이제, 이제 의심이 사라집니다. 의심이 사라졌다, 믿어졌다 하는 새로운 경험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