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총 이단사이비문제 상담소 소장 최삼경 목사는 “구원파는 구체적인 죄를 붙잡고 울고 불고 고백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중략) 구체적인 죄의 사실이 없이 죄인임을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최삼경, <현대종교> 1985년 5월호, ‘권신찬 박옥수 누구든지 대답하라’, p.90]”라고 비판하고 있다.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근본적인 회개가 아니라 일상의 구체적인 사소한 죄를 붙들고 울고불고 하는 기성 기독교인들의 회개의 모습을 비판한 일부 내용을 가지고 마치 구원파가 회개 자체를 부인하는 집단인 것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파에서는 구원을 위한 회개는 한번이면 족하다고 믿으며, 단번에 믿어지는 믿음을 간과한 채 일상적인 사소한 죄에 매달리는 기성교회의 분위기를 경계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구원을 위한 단회적 회개와 성화를 위한 반복적 회개를 구별하지 못한다며 구원파를 비방하고 있지만 결국 ‘회개’와 ‘자백’의 차이는 그 용어의 쓰임에 있을 뿐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도 육신을 가진 나약한 인간인지라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저런 크고 작은 죄를 범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이를 자백함으로 죄를 처리해 갈 수 있다. 이것을 가지고 매일 ‘회개’했다고 하든, 매일 ‘자백’했다고 하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무서운 죄를 저지른 다윗도 선지자 나단의 지적을 받은 후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시 51:12) 라고 했지, 구원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았다.

회개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생명을 얻게 하는 회개이고 또 다른 의미는, 자신의 어떤 잘못된 행동을 돌이키는, ‘자백’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회개가 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넬료라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 후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내려 그들이 구원받는 모습이 사도행전 11장에 나타난다. 18절에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라는 말씀이 있다. 이러한 생명을 얻게 하는 회개는 단 한 번만 있는 것이다.

“회개를 계속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구원파가 주장한다고 말하는 것은 ‘생명을 얻게 하는 회개’는 분명히 한 번임을 말하는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니다. 죄에 대한 자백이 있어야 되고, 그것을 회개해야 한다. 완전한 회개는 한 번 필요하고, 구원받은 후 생활에서 묻어 들어오는 죄에 대해서 자백이 필요하다고 한 부분에서 구원파를 오해하고 있든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돌아온 탕자는 당당한 아들이다. 그 아들이 만일 이튿날 아버지가 새로 입힌 옷을 벗어 개어 놓고 가락지도 빼어 놓고 신도 벗어 놓고, 문 밖에서 엎드려 울면서 지난날을 회개하며 다시 용서를 빌면, 이런 한심한 아들을 보면서 아버지는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구원받고 난 다음에 죄를 짓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솔직히 자백하면 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 죄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요 13:10)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의 구원을 예언하셨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면 지옥에 간다고 한다.”는 주장 또한 회개를 계속하면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는 주장과 비슷하다. 의도적으로 앞뒤의 말을 잘라버리고 만들어낸 이 말만을 들어보면 구원파의 구원관이 매우 이단적으로 여겨질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원파의 글과 강연을 직접 접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최대한 악용한 것이다. 짐작컨대, 확실히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가 예수의 피로 다 용서되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어 하나님께로 가지만, 우리 죄를 위하여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무시하고 여전히 자기가 죄인이라고만 한다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곡해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수의 보혈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우리는 여전히 현실 속에서는 죄를 짓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대언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의롭게 보아주시기 때문에 심판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찌 부인할 수 있겠는가?

초기 구원파의 전도방식에 있어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영원한 속죄와 구원을 강조한 부분이 의도하지 않은 오해를 낳게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체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이 지극히 부분 인용이나 심지어 근거 없는 내용으로 구원파를 비방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회개와 자백에 관한 설교는 아래와 같다.

2000년 2월 19일, 로마서 강연(2회)
성경을 자꾸 자꾸 읽어나가다 보면 육체는 세상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역시 베드로의 발을 다시 씻어야 되듯이, 예수님이 씻어 주셨듯이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8-9) 하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죄 사함은 받았지만 살아가는 동안 또 죄를 지었을 때 주님 앞에 자백하고 ‘이 죄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말씀을 믿었을 때 이미 지난 죄는 용서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죄 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영혼 구원은 받았는데, 육체의 삶이 남아 있지 않느냐. (중략)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하는, 영혼 구원받은 사람이 이제 머지않아서 부활의 몸으로 변한다 하는 것을 말해 놓은 것을 보면 우리는 성경을 믿은 후에 살아가면서 또 성경을 가까이함으로써 주님과 함께 걷는 것을 알아갑니다. 배워갑니다. 배워가다 보면 언젠가 내 영혼이 죄 사함 받은 것은 영원한 속죄였다. 내 영혼은. 그러나 내 육체가 남아 있기 때문에 육체에 묻어 들어오는 죄는 주님 앞에 자백함으로써 용서가 되고 있었다. 그것을 믿어가는 것입니다.

1999년 7월 29일, 31회 하기 수양회 강연
예수 믿고 죄 안 지어 본 사람 손 들어보라고 그러면? 크고 작은 경중의 차이뿐이지 죄는 다 지을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죄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영이 이 속에 살기 때문에. 주님의 영이 내 속에 오셔서 내 영과 함께 내 죽을 육체에 같이 머물러 계시지만, 내 영이 새롭게 되었다면 내 육신의 삶에 대해 무언가 환멸을 느끼거나 잘못된 것을 발견할 때, -과거의 죄 속에 살던 때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자녀가 안 되었을 때 그 죄의 시절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잘못된 것에 대해서 자주 자주 하나님 앞에 아뢰고 또 자백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 중의 일부분입니다. 왜 그러느냐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취급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뉘우침과 자백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확신을 갖지 않는 사람은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해 봤자. 자백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그 생활의 반복되는 씻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할 일입니다. 확실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은 그것 반복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종교적인 습관을 배운 거지. 그 이전에 완전한 회개가 한 번 필요할 뿐입니다. 탕자가 돌아섰듯이. 자기 아버지 집을 찾아오듯이. 완전히 돌아서는 그 회개가 한 번 필요하고, 그 다음에 생활에서 자백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일에 쓰이기 위해서, 혹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권속으로서, 식구로서 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